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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직장생활썰 모음

by 메르

2025.07.27 오전 08:01

직장생활과 관련해 개인적인 경험을 몇번 나눠서 쓴적 있다.

이번 글은 새로운 글이라기보다, 직장생활 경험을 합친 내용으로 개인 기록용이다.

내용중 신상이 오픈되는 5%정도는 비틀었지만, 95%이상은 사실이다.

아주 긴 글이고, 반복이니 기억나시는 분은 읽으실 필요가 없어보인다.

  1. 신입사원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곳은 삼성이었다.

다소 특별하게 채용이 되었지만, 신입사원 공채입사라 그룹 신입사원 수백명과 함께 연수원에 모여서 한꺼번에 교육을 받았다.

수백 명씩 교육을 시켜도 여러 차수로 나눠서 교육이 진행되는 엄청난 채용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나는 12차수 였고, 12차수중에 10팀이었다.

12차 10팀 12명중 5명이 현역에 남아있고, 2명만이 그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다. 이들과 1년에 한두번은 아직 만나고 있다.

23박 24일간 합숙으로 이뤄지는 빡빡한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배치 된 곳은 수십조 원의 금융자산을 운용하는 곳이었다.

인사팀에서 호출이 왔고, 배치면담을 하게 되었다.

당시 회사는 신입사원들에게 현장근무를 필수로 시키는 정책이 있었다.

신입사원들이 바로 본사로 배치되다보니, 현장을 너무 모른다는 판단을 경영진이 했고, 1년간 현장근무가 필수가 된 것이다.

당시는 조선업이 활황이었다.

큰 돈이 조선업에서 나오다보니, 조선소가 있는 도시에도 지점이 하나씩 있었다.

하지만, 서울 시각으로는 조선소가 있는 곳이 지방 오지 느낌이었다.

신입사원 아무도 그곳에 가지 않으려고 했고, 인사팀은 보낼 사람을 찾는데 고생하고 있었다.

인사팀 면담에서 내가 그곳에 가겠다고 지원을 했다.

특별한 의도가 아니었다.

부산에서 태어나서 자라다보니 지방생활에 익숙했고, 당시에는 아버지가 조선소에서 현장일을 하고 있어 거부감이 없었기때문이다.

인사팀이 이런 내용을 알리는 없었다.

회사를 생각하는 애사심이 있고, 의욕이 넘치는 신입사원이,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오지 근무를 자원했다는 느낌을 받은 듯 했다.

인사팀의 폭발적인 호의와 대환영 속에 거제도 고현이라는 곳으로 발령이 났다.

2. 지점

삼성중공업이 그곳에 있었다.

지점으로 가보니, 어렴풋하게 이미지로 예상하던 지점이 아니었다.

지점장 1명에 남직원 1명, 여직원 3명이 전체인 정말 자그마한 조직이었다.

남직원 1명이 문제였다.

회사가 일시적으로 고졸사원을 별도로 채용하던 때가 있었고, 그 남직원은 상고를 졸업하고 입사를 한 사람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한살 많고, 그곳 토박이라 회사생활도 그 지점에서만 5년가까이 했지만, 그는 4급이었고, 신입사원인 나는 3급이었다.

나는 그를 **주임님, 그는 나를 **씨라고 불렀고, 서로 존대를 하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직원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해는 간다.

일을 모르는 신입사원이 왔는데, 자기보다 직급이 높으니 일을 시킬수도 없고, 1년쯤 있다가 본사로 돌아갈 친구라 애매했을 것이다.

이 주임은 표시 안나고, 자잘하게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자기가 일을 잘 한다는 표시를, 내가 일을 못한다는 것을 보여줘서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제대로 일을 가르쳐주지도 않고 일을 맡긴 후, 진행이 잘 안되면 "하~참~힘드네"라는 식으로 지점장과 여타직원들에게 표시를 냈다.

지점장이나 여직원들까지 잠깐 있다가 본사로 돌아 갈 것 같은 내편이 아니라, 말뚝인 그 남직원 편에 서는 모습이 뚜렸했다.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외근업무가 주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한 외근은 조선소 아저씨들의 인솔이었다.

당시는 개인대출이 그렇게 쉽지 않았다.

특히 신용대출은 잘 해주지 않았고, 보증보험대출이라는 것을 많이 해주던 시기였다.

한국보증보험과 대한보증보험 2개의 보증보험사가 있었고, 이들이 개인신용을 심사해서 보증보험 증권을 발급해 줬다.

금융회사들은 이 보증보험증권을 담보로, 개인에게 신용대출을 해 준 것이다.

당시에는, 2개 보증보험사간에 전산연결이 되지 않았다.

1천만원짜리 보험증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면,

하루에 2개 보증보험사를 모두 방문해서 보험증권을 발급받으면, 2천만원을 받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했던 일은,

대출이 필요한 조선소 직원들과 쾌속선을 타고 부산에 가서,

중앙동에 있는 두 보증보험사를 방문해서 보증서 발급을 받고,

다시 서면에 있는 지역본부를 찾아가서 대출서류를 작성하게 도와주고 복귀하는 일이 주업무였다.

오전 여덟시경 출항하는 첫번째 배편으로 거제도를 출발해도,

2곳의 보증보험사와 지역본부를 다녀오면 오후가 되었고 하루가 끝났다.

이때 무뚝뚝해 보이는 조선소 아저씨들의 수다본능을 처음 알았다.

부산으로 가기위해 부두에서 만날때 인상은, 조선소 작업복을 입은 까맣게 탄 무뚝뚝한 상남자 였다.

하지만, 부산으로 가는 쾌속선안에서, 아버지도 부산의 조선소에 다닌다고 이야기 하는 순간, 이분들은 화색이 돌면서 말문이 터졌다.

나에 대한 시각이 순식간에 생판 모르는 양복입은 젊은 ㄴ에서, 같은 일을 하는 동료 아들뻘 정도로 바뀌는 것 같았다.

한번 대화가 터지면, 이야기 하면 안되는듯한 조선소 내부 문제까지 아저씨들의 발언에 제한선은 없었다.

조선소 돌아가는 것을 몇시간씩 듣고 나면, 다음번에 인솔하는 아저씨와의 대화는 더 심도가 깊어졌다.

이렇게 인솔을 하며 조선소 아저씨들의 거친 수다를 계속 듣다보니, 나는 조선소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한달쯤 거의 매일 이 일을 하는데,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왜 부산에 가야하지?

어차피, 가서 하는일은 구비서류 가지고 가서, 서류에 사인하고 오는것 뿐이었다.

보증보험사나 지역본부 입장에서 보면, 서류만 정확하게 들어오면, 나머지는 본인확인만 남는 것이었다.

정말 본인이 대출을 신청하는게 맞는지, 신분증과 본인을 확인하는 과정 정도가 부산방문의 핵심으로 보였다.

거제도에 보증보험사가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고, 거제도에도 2개 보증보험사의 지점이 모두 있었다.

거제도에 있는 보증보험사 지점을 찾아갔다.

거제도 보증보험사의 지점장들은, 본부에서만 승인해주면 자기들이 서류받는 일을 해주겠다고 했다.

보증서 발급이 지점 실적으로도 잡히니, 대환영 인것이다.

아저씨들을 인솔하고 부산 보증보험사 본부를 간 김에 보증보험사 부서장에게 면담신청을 했다.

거제도에 있는 보증보험사 지점에 서류를 접수하고 싶다는 내 제안에 보증보험사의 부서장은 시큰둥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이 보증서를 받을 수 있어 실적이 올라갈 것이라는 말에 솔깃해하는 느낌을 받았고, 결국 허락을 받았다.

나머지 1곳의 보증보험사는 힘들게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저쪽 보증보험사에서는 해준다는데요" 라니 바로 승인이 났다.

경쟁의 힘이다.

이제 남은 것은 부산본부가 남았다.

부산본부 부서장을 찾아가서 설명을 했다.

"고객들이 이렇게 불편해한다."

"보증보험사와도 이야기가 되었다"

"거제도에서 서류와 자서를 받아서 보내주겠다. 그러면 부산본부 방문객이 줄어들어 업무도 줄어들지 않겠느냐"는 내용이 골자였다.

부산본부 부서장 역시, 시큰둥하던 초기반응을 보였지만, 자기부서 업무가 줄어든다는 것을 확인하고 허락을 해줬다.

고객 불편같은 명분보다는 설득 대상의 이익을 건들면, 설득이 쉬워진다는 것을 부서장들과의 면담에서 깨달은 날이다.

지점에 사실을 알리니, 지점의 영업직들이 난리가 났다.

대출이 필요한 사람들 대부분이 조선소 근무자들인데,

주말에는 보증보험사등이 근무를 하지 않으니, 대출을 받으려면 하루 휴가를 내서 부산을 다녀와야 하는게 가장 큰 부담이었다.

이제부터는 점심시간에 나와서, 거제도에 있는 보증보험사 대리점을 잠깐 방문한 후, 내가 있는 지점만 오면 대출이 가능해진 것이다.

나중에는 보증보험사에서 자기들이 받아야 하는 서류를 내게 줘서, 보증보험사도 가지않고 나에게만 오면 모든 처리가 끝이 났다.

관할인 삼성중공업 뿐만아니라, 대우조선(현 한화오션)에 근무하는 근로자들까지 나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는 대출이 쉽지않던 시기라, 대출을 해주면, 대출을 받는 고객들이 다른 금융상품도 하나씩 가입을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조용하던 지점이 바빠졌고, 지점 실적이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점에서 나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남직원의 견제도 사라졌다.

바쁘기는 해도 스트레스 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3. 본부

거제도에서 평온하게 1년을 보내고, 본사가 아니라 부산본부로 발령이 났다.

서류접수를 논의하기위해 본부를 방문한 것을 부서장이 관심있게 지켜보고, 본사 인사팀에 강력하게 본부 배치요청을 한 것이었다.

2000년초에는 전산이 미흡해서 일을 수작업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역본부가 관할 지점의 실적을 집계하고, 여러가지 보고서를 쓰는 작업이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졌다.

지점들에게 언제까지 이러이러한 실적을 이메일이나 팩스로 보내달라고 하고, 본부는 이것을 모아서 보고서를 쓰고는 했다.

부산본부로 와서 처음 맡은 일은 지점에 연락해서 자료를 취합하는 일이었다.

취합한 자료를 정리해서 선배사원에게 주면,선배사원은 그것으로 이것저것 보고서 작업을 진행했다.

단순 반복작업을 하기싫어하는 INTP의 본능이 다시 발동하기 시작했다.

취합하는 내용들은 전산에 입력되어 있는 것들이었고, 단지 이것을 추출하지 못해서 수작업으로 전화나 메일을 하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본사에서는 지역본부에게 이런 자료를 보내달라고 하지 않았다.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확인해보니, 본사에는 IBM시스템이 있었고, 이런 데이타를 추출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접속권한을 부여받은 후, 프로그램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간단했다.

프로그램을 카피해서 본부코드를 지점코드로 바꾸니, 본사에서 지역본부를 집계하는 프로그램이 지역본부가 지점을 집계하게 돌아갔다.

부서장이 시킨 집계를 프로그램을 돌려서 가져다줬다.

프로그램에 귀재인 천재 신입사원이 들어왔다는 반응이었다.

사실은 프로그램을 짠게 아니라, 이미 본사에서 짜놓은 프로그램에 지점 코드만 살짝 바꾼 잔머리였다.

이때부터 지역본부 부서장에게는 신세계가 펼쳐졌다.

당시는 지역본부간 실적경쟁이 꽤 심한 시기였다.

자기 지역본부의 실적은 취합을 하면 알 수 있었지만, 다른 지역본부의 실적은 알수 없었다.

한달에 한번 본사에서 개최되는 업무회의에 참석하면, 그때야 지역본부별 순위와 함께 다른 지역본부의 실적을 알 수가 있었다.

내가 있는 부산지역본부는 달랐다.

내가 뽑아주는 데이타로, 자기 본부 외에도 다른 지역본부의 일일 실적이 어떻고, 어떤 상품이 잘 팔리는지 일단위로 알수가 있었다.

과거 스타크레프트라는 게임을 해본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이 뭐를 하는지 빤히 볼 수 있는 맵핵을 키면 게임이 얼마나 쉬워지는지를.

4. 본사

지방에 프로그램 천재가 있다는 엉뚱한 소문이 본사까지 났고, 연말 정기인사때 본사 발령이 났다.

2년만에 거제도 지점에서 부산 지역본부를 찍고 서울 본사로 온 것이다.

본사 부서가 하는 일은 거창했다.

본사 부서는 몇십조원의 자산을 주식,채권,부동산,해외투자, 펀드등 다양한 방법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입사원인 나에게 떨어진 일은 서류 정리였다.

돈을 운용하려면, 여러 가지 계약을 하게 되고, 계약서가 작성된다.

나에게는 완결된 계약서 뭉치가 던져졌고,

나는 그것을 품의서,약정서, 질권 설정계약서등 정해진 순서대로 정리해서 계약 1건당 1개의 서류철을 만드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번, 경리부서에 가서 현금을 찾은 후, 은행에도 갔다.

은행에 가서 사 오는 것은 수입인지였다.

인지세를 납부하기 위해서였다.

인지세는 중요한 계약에 납부하는 세금이다.

미국 독립전쟁의 원인이 된 것이, 영국 의회가 미국 식민지에 부과한 인지세였듯이,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세금이다.

자산운용 규모가 커서, 본사에서는 10억 이하 건들이 거의 없었고, 매일 체결되는 계약건수도 많았다.

은행에서 사 오는 인지 금액도 그만큼 많았다.

계약 건이 많은 날은 수입인지만 1천만 원어치 이상을 사 오는 날도 있었다.

이런 날은 야근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약서 1건마다 만 원짜리 인지 수십장을 딱풀로 붙이고, '인지세 납입완‘ 스탬프를 찍는 단순 반복작업에 시간이 꽤 들어갔다.

내용은 단순했지만, 문제가 되면 사건이 엄청나게 커지는 일이었다.

세무서에서 나왔을 때, 인지가 없는 계약서가 발견되면 탈세가 되고, 내부감사가 나왔을때 발견이 되면 횡령을 의심받는 일이라서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열심히 인지를 붙였지만, 세상에 이런 비효율이 없었다.

계약건과 금액은 어차피 전산으로 등록이 되고 확인이 되는데,

계약건의 인지세를 합산해서 세무서에 납부하면 그만이지,

왜 은행에 가서 수입인지를 사서, 한 건 한 건 풀로 붙이는 일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선배들에게 물어봐도 답은 비슷했다.

인지세법이 그렇고, 다들 그렇게 한다는 답변이었다.

부서장에게 인지세 업무개선을 해보겠다는 승낙을 받고, 관할 세무서를 찾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부서장은 정말 세무서와 협의가 된다고 생각하고, 내가 세무서를 찾아 가는것을 승낙한 것은 아닌듯하다.

새로 전입온 사원이 의욕이 넘쳐서 뭐를 한번 해보겠다고 하고, 실패해도 회사가 손해 볼 내용도 아닌듯하니, 해보라고 한 것인듯 했다.

관할 세무서를 찾아갔다.

인지세를 담당하는 세무원에게 전산에 이렇게 등록이 되니, 리스트와 합산 금액으로 인지세를 납부하면 안 되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관할 세무서의 나와 비슷한 나이의 젊은 공무원도 일반적인 공무원이 아니었던 것 같다.

자기도 비슷한 생각이라고, 위에 보고를 해보겠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한 달쯤 지난 뒤 세무서에서 연락이 왔다.

개선 효과는 확실한데 인지세법을 당장 바꿀 수는 없고, 우리 회사만 전산 납부로 테스트를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당시 내가 있는 부서에서 인지를 붙이는 일은 하루 평균 40건,

매일 회계팀에서 돈을 찾아서 거래은행을 다녀오는 일등을 감안하면 하루 2~3시간, 한 달로 치면 40-60시간의 업무량이었다.

회사내의 다른 부서와 본부, 지점에서도 비슷한 일들을 누군가 하고 있었는데, 회사 전체의 인지세 납부업무가 한꺼번에 바뀐 것이다.

세무서에 회사 전체의 계약 리스트를 전산으로 넘겨주고, 계약 금액에 해당하는 인지세를 모아서 납부하자,

수많은 지점의 직원들이 매일 은행을 왔다 갔다하고, 서류에 인지를 풀로 붙이는 단순작업이 본사의1~2시간 업무량으로 바뀐 것이다.

세무서 입장에서도 이익이었다

인지를 붙이지 않아 탈세가 되는일을 막을 수 있었고, 인지를 잘 붙이는지 기업들을 불시 점검하는 업무를 안해도 되는 이득이 있었다.

나는 한국은행 업무개선상을 받았고, 세무서는 인지세 전자납부를 전국으로 확대 시행했다.

좀 오래 회사를 다니신 분들은 수입인지를 사서 붙이는 일을 해보셨을 수도 있다.

그 단순 반복작업이 사라지는데 내가 꽤 기여를 했다.

이렇게 하기싫은 일을 바꾸는 것에 재미를 들이다보니,

뒤에 언급할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일머리 있는 직원으로 승승장구 할 수 있었다.

생각 하면서 일을 하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니다.

5. 예외승인

대리가 되면서 본사에서 맡은 일은 예외 승인이었다.

예외 승인은 전체 자산의 5% 이내에서, 기준을 벗어나는 특이한 건들을 정밀심사를 통해서 승인해 주는 업무였다.

기준에서 벗어나지만, 이런 장점이 있으니,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해줄만한 것이 아니냐는 의사결정이다.

물론 일개 대리가 심판관이 아니다.

의견서를 작성해서 올릴 뿐이다.

하지만, 실무자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는 문화가 있었기때문에, 내 결론이 보통 그대로 끝까지 갔다.

예외승인에는 금액이 일정 한도를 넘어가는 거액이거나, 담보가 일반적인 부동산이 아닌 어려운 건들이 올라왔다.

© 쭈시기, 출처

기준을 벗어난 것을 심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보니, 나름 조직내 에이스에게 맡기는 업무이기도 했다.

예외승인을 하다보면, 신규대출만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예외승인건이 만기가 되었을 때 연장하는 건도 심사를 하게 된다.

만기가 다가와서 연장 대상에 오른 부동산 담보대출 건이 하나 있었다.

금액은 백억원도 되지않아 소액이었지만,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은 담보가 섬이었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바다에 있는 섬도 아니고, 서울에서 꽤 먼 북한강 중간에 있는 작은 섬이라, 아무리 뜯어봐도 담보로서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선배가 왜 승인해줬는지 모르겠지만, 만기에 갚든지, 아니면 20%를 상환하고 1년 연장을 하라고 심사서를 작성했다.

결국, 그 예외승인건은 다른 금융사가 대출을 해줘서 상환이 들어왔다.

세월이 좀 지났다.

서울에서 꽤 먼 북한강 중간에 있는 작은 섬이 지금은 꽤 유명한 곳이 되어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해줘도 됐을 것 같다.

6. 자필서명

지금 생각하면, 업무에 대한 자신감은 대리 때가 가장 컸던 것 같다.

한마디로 겁이 없는 때였다.

지금은 은퇴하신 타그룹 회장님의 대출서류가 올라왔다.

© HeyJUNE, 출처

실무자였던 나는 서류작성을 하기 위해 회장님에게 사무실로 오라고 해당그룹 비서실로 연락했다.

오너 면 오너지, 서류는 와서 직접 적어야지라는 생각이었다.

상사가 비서실에서 연락을 받고, 본인이 가서 자서를 받아오겠다고 하며 허겁지겁 나갔다.

상사는 양재동에 다녀와서, 자필 확인사인을 한 서류를 내게 넘겨줬다.

서류를 주면서 별말이 없던 것을 보면, 원칙을 지키는 후배에게 탓을 하지 않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한 좋은 상사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좀 ㄸㄹㅇ라 포기했을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사는 나를 후자로 생각했을 것 같다.

7. 실패

성공만 한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월드컵을 하게 되었다.

한국팀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할 경우, 경품을 주는 이벤트를 회사는 하기로 했고, 보험을 들기로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혹시라도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올라가면, 경품 지급비용이 과다하니, 보험으로 커버하기로 한 것이다.

런던에 있는 보험사에 요율을 알아봤다.

24%라는 답을 받았다.

뭐? 한국이 월드컵 4강에 들어갈 확률이 24%라고?????

16강도 힘들어 보이는데, 8강도 아니라 4강에 들어갈 확률을 24%로 부르니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보험요율이 너무 높게 나오자,

보험없이 경품행사를 강행하느냐 포기하느냐를 가지고 부서내 치열한 논의가 있었고,

4강 가능성은 없지만, 보험없이 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고 보고 이벤트는 기획단계에서 취소되었다.

한국팀이 월드컵 4강에 진출했다.

남들은 한국의 4강 진출에 흥분할때

‘영국 보험사 좀 치네...’라며, 나를 포함한 부서원 전원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난다.

8. 면담

대리 때 이야기다.

당시 하는 일은 금융상품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다른 회사의 과장이라는 사람에게 금융상품과 관련한 면담 요청이 왔다.

금융상품을 개발하려면, 전문 영역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일상이라 그러려니 하고 면담 약속을 잡았다.

과장과 미팅이라면 대리인 내가 가야지 하면서, 팀장에게 외부 미팅 보고를 하고 약속시간에 맞춰서 찾아갔다.

약속장소는 과천이었다.

과장이라고 해서 30대로 생각했는데, 50대 이상으로 보이는 중후한 아저씨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명함을 내밀었다.

아래 명함이 그때 받은 명함이다.

물어보는 말에 의견을 이야기해주고 돌아왔다.

복귀해서 보고를 하니, 상사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팀장은 과장은 과장인데, 같은 과장이 아니라는 논리적으로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서 거품을 물고 있었다.

대략 하는말을 들어보니, 직급이 과장이 아니라 과를 맡고 있는 과장이라는 말이었다.

재정경제부 세제실 소득세제과는 꽤 힘이 있는 부서고, 그곳의 과장은 대리가 혼자 털레털레 찾아갈 곳이 아니라고 했다.

'ㅈㄴ복잡하네' 하면서 넘어갔다.

하여튼, 이 과장분이 나를 부른 이유는 역모기지(Reverse mortgage) 때문이었다.

원래 출장을 다녀오면 막내가 출장 보고서를 쓰기 마련이다.

미국 모기지(주택구입자금 대출) 시장을 벤치마킹 다녀와서, 출장 보고서를 쓴 적이 있었다.

© kapischka, 출처 Unsplash

출장 보고서를 쓰다 보니, 생각보다 재미가 있어 탄력이 붙었다.

미국 모기지 시장 구조, 대출 상품, 보증 방식, 신용평가, 유동화 구조 등을 적다 보니 보고서가 150page를 넘어간 것이다.

스테이플러로 찍기에는 너무 두꺼워서, 회사 앞 복사점에서 제본을 해서 팀장에게 제출했다.

출장보고서를 쓰라 했는데 책을 만들어 오니, "요새 일을 적게 줬나?"라는듯한 표정으로 팀장이 보고서를 받아서 넘겨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팀장은 10부를 더 제본해오라고 했고, 며칠 후에는 100부를 제본하라고 했다.

팀장이 보고서를 타부서 여기저기에 돌린듯했고, 이것이 다시 복사본으로 사외로 퍼진듯했다.

지금처럼 해외정보 수집이 쉽지않고, 정보 보안이 강하지 않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이야기다.

그 복사본 중 하나가 재경부 소득세제과 과장에게 들어간듯했다.

내가 정리한 내용 중 재경부 과장이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역모기지(Reverse Mortgage) 였다.

역(Reverse)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일반적인 모기지(주택구입자금대출)과는 반대의 개념이라서 그렇다.

일반적인 모기지는 집을 구입하는 자금을 일시금으로 대출받은 뒤 몇십 년간 갚아나가는 방법이다.

역모기지는 일반적인 모기지와 반대로 집을 담보로 대출금을 월급처럼 분할해서 받는 방법이다.

주로 연금이 부족한 노년층들이 집을 담보로 필요한 자금을 연금처럼 받는 것이다.

© I.T. SHIN, 출처 OGQ

그 과장은 고령화사회에 대비해서 한국에 역모기지 도입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벽에 막혀 있었다.

그때, 내 책(?)을 읽게 되었고,

책에서도 해결이 안 되는 몇 가지 의문이 있어 저자(?)를 탐문해서 나를 부른 것이다.

전문가를 불렀는데, 생각보다 어린ㄴ이 와서 놀란듯하고, 생각보다 늙은 분이 불러서 나도 놀랐다.

당시 그 과장이 해결 못한 숙제는 대출한도가 넘었을 경우에 대응이었다.

노령층이 집을 담보로 매달 연금처럼 분할해서 대출을 받는데, 사람은 생각보다 오래 살 수도 있고 일찍 죽을 수도 있다.

일찍 죽으면 문제가 없지만, 오래 살면 문제가 생긴다.

일반적인 미국의 역모기지는 지급기간을 정하는 방식이다.

© brenoassis, 출처 Unsplash

60세에 월 100만 원씩 20년간 매달 연금 형식으로 받을 경우, 80세에 연금이 끊기고 집이 넘어간다.

그런데, 80세 노인을 연금 지급기간이 지났다고 살던 집에서 내쫓을 수도 없다.

지급기간이 끝났다고 연금을 중단하는 것도 쉽지않다.

80세 노인에게 연금을 중단하고, 이것때문에 노인 신상에 문제가 생길경우, 한국은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당시 과장에게 해답으로 연금과 보험의 믹스를 제안했다.

한국에서 역모기지가 시장에 먹히려면, 죽을 때까지 연금을 지급해야 한다.

그러려면, 보험의 성격을 역모기지에 넣어서, 기대수명보다 오래 살 때는 연금보험으로 연금을 죽을 때까지 계속 지급하는 방식이다.

기대수명보다 오래 생존하는 사람만 보험금 지급 대상이 되니, 보험료가 비싸지는 않을 것이고, 보험료는 매달 지불하는 대출금에서 자동적으로 감액되게 상품을 구성하면 될 것 같다고 답변을 한 기억이 난다.

직접 만난것은 이때 뿐이었지만, 답을 찾은듯한 반응을 보면 면담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훈훈하게 끝났다.

이후 이 과장님은 조금 더 승진을 한듯하다.

9. 주택연금

주택금융공사가 출범했다.

새로 출범한 주택금융공사가 유동화 전용 모기지 상품을 만들 때, 금융권 대표 실무자로 공식 차출 요청이 왔다.

나를 추천한 것이 그때 재경부 과장님이라는 이야기를 뒤에 들었다.

팀장의 "사람도 안 주면서 빼가네 ㅅㅂ " 하는 투정을 뒤로하고,6개월 정도 주택금융공사로 출근을 하면서 정시 출퇴근의 꿀을 빨았다.

당시, 금융권에서 대표선수로 차출된 나를 포함한 4명과 주택금융공사 직원이 만든 상품이 지금의 보금자리론이다.

유동화(MBS)가 쉽게 상품구조를 짜고, 대출약정서등 계약서를 만드는등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보금자리론은 당시 주택금융공사 모기지론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지만,

역모기지는 한동안 조용해서, '그냥 검토만 하고 끝났구나'하고 생각했다.

나는 회사를 옮겼고, 얼마 후 역모기지는 주택연금이라는 이름으로 주택금융공사에서 출시되었다.

역모기지(Reverse Mortgage)가 일반인에게 부정적인 이미지의 용어라고 보고 주택연금으로 네이밍을 한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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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야기했던 장애요인들을 대부분 해결하고 출시가 되었고, 내가 이야기한 부분들이 모두 반영된듯 했다.

부부가 주택연금을 가입하면, 주택 소유자(주로 남편)가 사망해도 연금이 끊긴다든지, 배우자가 집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배우자가 살아있으면, 부부 모두 사망시까지 거주할 수 있고, 기존 연금과 100% 동일한 금액이 부부 모두 사망 시까지 지급된다.

두 명 모두 사망했을 경우, 주택금융공사는 주택을 가져가서 매각한 후, 연금으로 지급했던 돈과 비용을 회수하는 구조다.

주택 가격이 하락해서 생각보다 낮은 가격에 매각이 되면, 주택금융공사가 손해를 보고 상황이 끝이 난다.

주택 가격이 올라서, 매각을 했을 때 주택금융공사가 받을 돈(원금+이자+보증료)을 받고 남으면, 그 돈은 상속인에게 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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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연금을 받고 부부 모두 사망을 하면 자녀에게 선택권이 생긴다.

집의 시세가 5억 원인데, 어르신들이 오래 장수하다 보니 주택연금을 7억 원 받았다고 하자.

2억원 손해는 주택금융공사가 책임을 지고, 자녀들에게 추가 청구 하지 않는다.

집의 시세가 5억인데, 갑자기 병에 걸려서 1억만 주택연금을 받고 사망을 했다고 가정하자.

자녀들은 주택공사가 집을 판매해서 정산하고 남는 돈을 받든지, 아니면 1억의 채무를 안고 5억짜리 집을 가질 수도 있다.

자녀 입장에서 돈이 되면 주택을 인수하고, 돈이 안되면 포기하면 되는 것이다.

주택연금은 시간이 갈수록 더 빠르게 확산될 것이라고 본다.

나부터 자녀에게 부양을 받는다는 개념이 없다.

내 노년은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재산은 자녀와 무관한 내 것이고, 상속은 죽을 때까지 쓰고 혹시 남으면 누군가 가져가는 것이라고 본다.

재경부 과장사건 이후,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사전에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나가는 습관이 생겼다.

10. 직장상사

회사 생활을 하면, 다양한 유형의 직장 상사를 만난다.

대부분 괜찮은 분들이었지만, 1명은 특이했고, 1명은 이상했다.

특이한 상사는 저녁 9시까지 일을 하지 않았다.

회사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인터넷을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 9시가 되면, 이때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상사는 저녁 먹은 것이 소화되고 적당한 공복 상태가 되어야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반면에,

오전 7시부터 시작되는 업무시간에 풀가동을 하는 나는, 머리가 지친 저녁시간대에 그 상사와 공동작업을 해야 했다

나는 그 상사가 없이도 일을 할 수 있지만,

그 상사는 내가 없으면 일이 안되기 때문에 공동작업에 빠질 수가 없었다

나는 통계나 분석 프로그램을 돌려 원하는 데이터를 뽑아낼 수 있었지만, 상사는 그것을 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보통 모형을 돌려서 데이타를 추출하고 정리하는 내 작업이 끝난 후 상사의 일이 시작되고는 했다.

저녁까지 상사가 빈둥빈둥 노는 것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은 이유다.

차장이었던 상사가 집중을 하는 과제는 오전 일찍 열리는 임원회의때 모시는 임원이 들고 들어갈 참고 자료를 만드는 것이었다.

보통, 임원 미팅 전날 오후가 되어야 다음날 임원 회의 주제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참고 자료를 미리 준비할 수는 없었다

새벽 1~2시쯤이 되면, 내가 해줄 부분은 보통 끝났다

나는 '먼저 퇴근하겠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새벽 퇴근을 했고, 상사는 마지막 마무리를 했다

내가 만든 초안과 상사가 마무리한 최종안을 비교하면, 글자 간격, 강조, 미묘한 표현 등 디테일이 달라져 있었고, 더 좋아진 것은 맞았다.

이 상사의 다른 특이사항은 화면으로 보지 않고 꼭 출력을 해서 보는 것이다.

출력한 문서에 수정사항을 연필로 기재하든지, 말로 내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것을 반영해서 재작업을 한 후, 가져다주고, 잠시 후 상사의 새로운 요구가 들어오는 일이 새벽까지 계속 반복되었다.

감사를 받은 일까지 있었다.

출력이 과다하게 일어나는 것이, 혹시 퇴직이 확정된 상태에서 내부정보를 출력해서 빼가는 것으로 의심을 받은 것이다

감사팀이 의심할만하다고 생각하고 납득했다

가장 심하게 수정한 건을 보면 본문 3page, 별첨 4page, 총 7페이지짜리 상품개발 문서의 출력량이 A4문서 2박스가 나온 것이다

100장짜리 2묶음이 아니라 20묶음인 2박스 분량의 개인 출력 기록이 문서 하나로 잡힌 것이다

이 상품개발 문서가 20조 원 판매라는 회사 설립 이래 최대 기록을 세운 것을 보면, 그 상사를 탓하기 애매하기는 하다

이 상사는 보통 새벽 3~4시경에 보고서를 팩스로 직속 임원에게 발신했다.

그리고, 한 부를 인쇄해서 그 임원방 책상에 올려놓고는, 회사 의무실로 내려갔다.

회사 의무실에는 새벽에도 문이 열려있는 빈 침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원의 시각으로 한 번 보자

아침 일찍 일어나면,

그날 임원 회의를 할 주제와 관련된 보고서가 팩스에 와있고,

보고서를 읽으며 사무실에 출근하면, 바로 들고 들어갈 수 있게 책상에 그 문서가 놓여있는 것이 좋았을듯하다.

이 상사는 임원까지는 승승장구했다.

다만, 그게 끝이었다.

분석하고 보고하는 것에 특기가 있었지, 본인이 의사결정하고 추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사 밑에서 배운 것은 기획 보고서를 만드는 방법이다.

주제를 잡고, 정보를 모아서 정리한 후, 긴 내용을 핵심으로 요약하기 등등 기획의 기초를 잡을 수 있었다.

11. 워라벨

최근 10년 정도를 보면, 아주 특별한 일이 없으면, 5시 30분에 일을 끝낸다.

직전 10년간 휴일에 회사를 나간 날짜는 20일이 안 되는 것 같다.

© 이숩, 출처

1년에 두세 번 정도, 급한 일이 생겨서 주말에 나가야 하는 일이 생기기는 하지만, 일상적이지는 않았다.

퇴근 이후에는 메시지도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워라벨이 꽤 맞춰진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대리 시절 5년은 달랐다.

대리 시절의 하루는 다음과 같이 흘러갔다.

다섯시 오십분, 통근버스를 타면 여섯시 이십분에 회사에 도착한다.

© PHOTOSIHO, 출처

사무실에서 살짝 떨어진 구내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으면 여섯시 사십분 정도가 된다.

업무는 일곱시부터 시작된다.

오후 4시가 되면 공식적인 근무시간이 끝난다.

하지만, 공식적인 근무시간이 끝나는 것이지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도 일은 계속되었다.

출근은 통근버스가 있지만, 퇴근은 지하철로 해야 했다.

© 문과스텐, 출처

지하철로 퇴근하려면 11시에는 나와야 한다.

취객들과 한 시간 가까이 2호선을 타면, 선릉역에 도착한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면 열두시가 넘는 게 보통이었다.

회사는 74제라고 했지만, 우리들은 이것을 세븐일레븐이라고 불렀다.

기획부서라는 곳은 일에 끝이 없었다.

특히, 루틴 하게 업무시간을 많이 차지하는 것은 티타임이라고 부르는 임원회의 준비였다.

월 수 금 아침 7시에 시작되는 임원 회의의 주제는 금화목 저녁 5시쯤 CEO에 의해 최종결정 되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다음날 아침 오전 7시에 시작되는 회의에 임원회의 주제의 참고자료를 준비하려면, 야근이 당연했다.

주제가 자유토론으로 잡히면 머리가 더 아팠다.

시험에서 예상문제를 뽑듯이, 최근 이슈를 확인해서 예상답안지를 만들어야했다.

새벽 1-2시에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라고 인사를 한 뒤, 택시를 타고 집에 오면, 5시50분에 출발하는 통근버스를 타야했다.

© Yulia Pushkareva, 출처 OGQ

일주일에 3일은 새벽퇴근, 2일은 11시쯤 퇴근, 1일은 회식인 루틴이 계속 돌아가는 대리시절 5년을 보냈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그래도 지나고 보니 헛일은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현안을 분석해서 대책을 세우고, 이것을 읽기쉬운 문서로 만드는 능력이 만들어졌다.

이것들을 활용하니, 남들보다 숫자를 조금 더 쉽게 낼 수 있었다.

어쩌면, 회사를 옮긴 이후에 워라벨을 지키면서 잘 버틸수 있었던 것도, 숫자와 결과가 나와서 였는지도 모른다.

회사원에게 숫자는 인격이다.

보통 실적이라고 부르는 숫자가 나오면, 말에 힘이 생기고, 함부로 건드리는 사람이 사라진다.

처음부터 워라벨이 가득한 생활을 했다면, 숫자를 잘 낼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지않은 길이라서, 함부로 이야기 하기는 어렵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숫자와 실적 없이 워라벨만 찾게되면, 회사에서의 상대평가는 뒤쳐지게 된다.

12. 이직

회사에 제안 캠페인이 있었다.

기존 프로세스의 일부를 아웃소싱하고, 아웃소싱하는 업무에 보험을 집어넣어서, 비용을 크게 절감하면서도 해당 업무에서 발생하는 위험까지 보험이 커버하는 제안을 했다.

호평을 받아 제안 최고상을 수상했다.

당시로는 큰돈인 상금 오백만 원을 받았고, 비즈니스 모델로 특허 출원도 했다.

상을 받고 얼마 후, 3명의 점잖고 나이 많은 신사분들이 면담 약속을 하고 나와 부서장을 찾아왔다.

특별한 내용도 없이 두서없이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만을 하고 그분들은 돌아갔다.

알고 보니, 기존 프로세스로 돈을 버는 분들이었다.

한 분은 퇴직 임원, 한 분은 현재 대표이사의 친인척, 나머지 한 분은 그룹 오너 바로 밑 넘버 2의 친형이었다.

새로운 프로세스를 적용하면,

회사는 비용을 절감하고 위험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이분들의 매출과 수익은 급감하게 되는 것이다.

정중하게 티타임을 하고, 잘 부탁한다 정도의 일상적인 대화만 하고 이분들은 돌아갔지만, 부서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특히 그룹 넘버2의 친형분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자신이 상을 탄 것처럼 좋아하던 임원이 "왜 그런 쓸데없는 제안을 해서 문제를 일으키냐"라는 식으로 톤 앤 매너가 바뀐 것이다.

담당자의 소신은 어떻게든 지켜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일해온 회사에 의문이 생긴 시기였다.

귀신같이 이런 타이밍에 헤드헌터사에서 연락이 왔고, 나는 외국 자본이 들어온 기업으로 회사를 옮겼다.

사안을 하나만 보지 않고, 앞뒤, 전후 연결 관계를 주의 깊게 보는 습관이 이때부터 시작한 듯도 하다.

결론은 잘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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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업 한곳에서 퇴직할 때까지 우물 안 개구리로 살뻔했는데, 이분들 덕분에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세상을 볼 때 하나하나가 아니라 연결을 보는 습관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13. 면접

회사를 옮기려고 하면, 평판 조사를 당한다.

평판 조사는 본인 모르게 보통 진행된다.

헤드헌터사들이나 해당 인사팀에서는

옆 부서라든지, 같은 곳 출신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사람들에게 보통 평판을 묻게 되는 것 같다.

“쟤 회사 옮기려나 봐” 하는 소문은 보통 여기서 퍼지게 된다

나중에 듣기로,

내 평판은 짧은 한 문장으로 요약이 되었다고 한다

“눈깔 같은 인재”

처음 이 말을 듣고는 눈깔이라는 단어가 비속어 같아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데, “조직의 나아갈 길을 밝은 시야로 보여주는 기획 인력”이라는 헤드헌트쪽의 좋은 해석이라고 했다.

"그렇군" 하고 넘어갔다.

평판 조사 과정에서 회사를 옮긴다는 소문이 났다.

싱숭생숭한 김에, 헤드헌터사의 제안이 왔고,

내 몸값이 얼마인지 알아나 보자고 시작한 것이, 소문이 나면서 빼박이 되 버린 것이다.

이직에 절실하지 않은 애매한 정신 상태다 보니, 이직 과정에 건방을 많이 떨었다.

면접한다고 업무시간에 회사를 자주 나올 수가 없으니, 면접은 한 번만 하게 해달라고 헤드헌터사에 요구했다.

그 회사의 기획담당 임원과 1 대 1 면접을 1번만 하는 것으로 결정 되었다고 연락을 받았다.

면접 당일,

면접 약속시간 십 분 전에 도착을 했다.

나를 면접할 임원의 비서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차 주문을 받았다.

사장님이 급하게 부르셔서, 전무님이 방금 사장실에 올라가셨어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내 판단에 잠깐이라는 시간은,

최장 10분,

예의를 갖춘다면 15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 15분간 기다린 후, 전무가 나타나지 않자 그곳을 나왔다.

전무비서가 당황해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이 회사와의 인연은 이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후,

면접도 없이 채용이 확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팀장 보직,

대리에서 차장으로 두 등급 직급 상향,

2년 연봉 사이닝 보너스,

기존 회사에서 받는 급여 대비 1.5배 상향등 제시하는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2년 연봉 사이닝 보너스는 내가 봐도 말이 안되게 우기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수용한 것이다.

말이 안된다는 이유는 내 논리가 이렇게 허접해서 였다.

"회사가 희망퇴직을 얼마전에 했다. 2년간 연봉이 희망퇴직금 이었다. 니들이 조금만 빨리 나에게 제안을 했으면 나는 희망퇴직금을 받고 이직했을 것이다. 그러니 내놔라"는 논리가 말이 안된다는 것은 나도 알았다.

내가 울컥해서 이직의향을 밝혔는데, 사실 별로 이직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까지 받은 것이다.

뒤에 들은 이야기다.

기획담당 전무는 내가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는 비서 말에 필이 꽂혔다고 한다.

원래, 아이스크림을 먹기 직전에 바닥에 떨구면, 생각보다 많이 아깝다.

그 사람에게 내가 먹기 직전에 떨어뜨린 아이스크림처럼 보였던 듯하다.

결국 면접 한번 없이 채용이 되었고, 바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가장 긴장되던 시간은 건강검진 결과를 기다리던 때였다.

기존 회사에 사표는 냈는데, 건강검진 결과에 따라 입사가 취소될 수 있다는 인사팀 통보를 뒤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직과 관련해서 자주 해주는 말이 있다.

직장인의 전직은 타잔 줄타기와 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음 줄을 확실하게 잡은뒤, 지금 붙잡은 줄을 놓아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입사결정 통보를 받고 사표는 이미 냈는데, 건강검진이 남았다니...

어차피 소문은 나버렸고,

이직 사실을 부서에 알린후, 거의 매일 이런저런 환송회에 불려다니면서 과음한 것이 신경이 많이 쓰였던 기억이 난다.

14. 이상한 상사

출근하는 첫날,

직속 상사인 임원을 처음 만났다.

그러고 보니, 나는 담당임원과는 얼굴 한번 보지 않은 낙하산이었다.

직속 상사는 인도인 이었다.

인도인에 대한 이미지를 극도로 부정적으로 바꿔준 인물이다.

이 사람과 파란만장한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도인 상사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직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상사가 총애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주말에 상사 집에 가서, 상사의 가족들과 놀아주면서, 여러 가지 애로사항을 해결해 주는 대단한 회사형 인간이 있었다.

그 직원이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다.

거절을 못 하는 원만한 성격에, 가족이 캐나다에 있어, 어차피 혼자 있는 주말에 상사 집에 가는 것이라 스트레스가 아닌듯했다.

퇴근후나 주말에는 업무 관련 톡조차 주고받는 것을 싫어하는 나와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이지,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을듯하다.

인도인 상사는 나와 미팅을 할때,

자기가 모르거나, 자기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내가 하면, 내 말이 의심스럽다는 표정과 함께, 비서에게 그 직원을 부르라고 지시했다.

그 직원이 나보다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나는 차장급 팀장이고, 그 직원은 옆부서의 과장급 팀원인데,

그 과장이 있는 자리에서 똑 같은 설명을 나는 한번 더 해야했고,

그 과장이 고개를 끄떡이며, 인도인 상사에게 내 말이 맞다는 설명을 해야 안건이 통과되었다.

그때마다 기분이 많이 나빴고, 기분나쁜 표정을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그런 점에는 약하다.

표시가 났고, 상사는 그런 나를 더 싫어했다

내가 신설팀을 만들며 합류하자, 겸사겸사 조직을 재정비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상사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그 과장은, 그 기회를 살려 가족이 있는 캐나다 복귀를 인사팀에 신청했다.

15. 팀 만들기

원래 신설팀을 만들어 팀장이 오면, 기존팀에서 팀원을 한두명씩 빼서 기본적인 조직을 갖춰주는게 일반적이다.

인도인 직장상사는 사람을 주는게 아니라 예산을 줬다.

딱 3억원

3억원은 내가 채용할 수 있는 직원의 총 연봉 한도다.

연봉 1억대 과장 1명에 연봉 6천만원의 대리 3명 정도를 뽑을 수 있는 예산이었다.

조금 과거 이야기라서 연봉이 낮아 보일것이다.

보통 20명내외에서 팀이 만들어지는데, 3억원으로는 아주 작은팀을 만들수 밖에 없는 예산이었다.

대리로서 팀원 생활만 하다가 처음 팀장이 된 상태라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팀원이 많은 것에 특별한 부러움이 없었고, 사람을 뽑기 시작했다.

16. 홍대 클럽 죽순이

일을 하다보면, 여러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하는 PT를 듣다보면, 저 친구 좀 치는데 하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다.

평소 업무상 방문하는 거래처 사람이 신입사원을 받았다고 데리고 왔고, 몇번 PT를 듣다보니 물건이라는 감이 온 친구가 있었다.

금요일 저녁 6시가 되면, 탈의실에서 복장을 바뀌입고 홍대로 달려가는 클럽 죽순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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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죽순이면서도, 대학원생인 남자친구를 헌신적으로 케어하는 독특한 삶의 스타일이었다.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그 친구 입장에서는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것이고, 급여도 꽤 점프를 하니 적극적으로 수용의사를 보였다.

내가 미안한 것은, 그 친구를 데리고 다니며 교육시키던 상사 였다.

그 친구가 워낙 튀는 스타일이라, 조직장 입장에서 관리하기 예민한 스타일은 맞다.

하지만, 관리할 가치가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 회사는 중소기업 규모라서, 저 정도 급여에 저정도 능력의 신입사원을 다시 쓰기는 힘들 것으로 보였다.

어느날, 그 상사에게서 면담요청이 와서 만나게 되었다.

상사는 그 친구의 사용설명서(?)를 알려주었다.

- 세세하게 과정 관리를 하는 것 보다는 맡겨두고 결과 관리를 하는게 낫다.

- 실적을 가져가지 마라.

- 겉은 약해보여도 속은 마쵸다.

사용설명서의 골자는 위 3가지 였다.

자기를 떠나는 직원을 위해, 다른 회사를 찾아가서 사용설명서(?)를 알려주는 그 친구의 상사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기업을 키워서, 코스닥에 상장한 후 대표이사가 되었고, 얼마전 대기업에 천억원이상을 받고 지분을 판뒤 Exit했다.

일을 같이 하다보면, 퀄리티 있는 사람은 표시가 난다.

17. 농땡이

두번째 채용한 직원은 전 직장의 농땡이 였다.

해외 핵심인력 채용으로 들어온 그 친구는 학벌은 글로벌 탑급, 일에 대한 의욕은 글로벌 꼴찌였다.

한마디로, 한국 조직문화에 적응을 전혀 못하는 일명 '조직 부적응자' 였다.

생각은 많고 똑똑하다.

그런데, 딱 그정도다.

한국에서는 보통 이런 사람을 입만 살았다고 한다.

항상 부서에서 가장 낮은 고과는 그 친구 차지였다.

그래도, 그 생각의 퀄리티가 아까와서 합류 요청을 했다.

바로 승낙을 받았다.

18. 근면성실

세번째 합류멤버는 전 직장에서 승진을 누락한 대리 였다.

본인이 일을 못한 것이 아닌데, 승진에 누락된 선배를 승진시키는데 동의해서 본인이 탈락한 것이다.

인성이 좋고, 주변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잘 하고, 근면 성실한 스타일이다.

크게 잘 하는것은 없지만, 크게 실수하는 것도 없이, 꾸준하게 중상정도의 퀄리티가 나왔다.

뭐랄까..부서가 큰 문제없이 안정적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최적인 인물이었다.

부서내 유일한 과장이 되었다.

이렇게 3명을 채용하고, 1명을 여유로 남겨둔채 팀 세팅을 끝냈다.

그리고, 예산에 카운트 되지않는다는 신입사원 한명이 추가로 합류했다.

신입사원은 전력에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인사팀에서 신입사원은 인건비 예산에 카운트 되지 않는 공짜라고 해서 받았다.

그런데, 받고나서 인사팀장이 바뀌었고, 새로온 인사팀장은 여유로 남겨둔 1명의 잔여예산을 가져가 버렸다.

있을때 써야하는게 회사 예산이라는 것을 알게된 때다.

19. 회식

사무실이 여의도니 홍대에서 주로 회식을 했다.

© zerotake, 출처 Unsplash

여의도에서는 아무리 비싼것을 먹어도 업무의 연장 같아서 재미가 없었다.

기존 사무직 여직원 1명을 포함해서, 전체 팀원은 나 포함 6명이었다.

6시에 출발해서 6시30분에 회식을 시작하면, 7시30분에 농땡이 여대리는 봐야하는 드라마(아마 주몽이었다)가 곧 한다고 일어섰다.

6명이서 맥주 4병을 마시고 8시에 헤어졌을 뿐인데, 다음날 아침 신입사원은 취해서 오전 반차를 쓰겠다고 연락이 온다.

나를빼고 2차를 달린게 아니라 그만큼 술이 약하다는 말이다.

당나라 군대 같지 않은가?

그런데, 생각보다 팀이 잘 돌아 갔다.

농땡이 여대리와 근면성실 남과장을 2인 1조로 묶으니, 여대리가 아이디어를 지르고 남과장이 마무리하는 환상의 조합이 나왔다.

홍대클럽 죽순이 여대리는 회사 원탑을 자랑하는 미모의 껍질을 쓰고, 마쵸의 심성으로 타부서와 협의에서 승승장구 하고 돌아왔다.

술이 약한 신입사원은 언제나 말짱한 정신으로 선배들의 지원을 잘 했고, 심지어 기존 조직에서 받은 사무직 여직원까지 날라다녔다.

뭐랄까..

한명 한명은 어딘가 하자가 있는데, 모아놓으니 시너지가 나오는, 팀으로는 드림팀이 구성된 느낌이었다.

20. 미국출장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미국 출장을 가게 되었다.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과 모기지(주택대출) 회사들을 돌아보는 현장탐방 일정이었고,

상사가 좋아하는 과장의 캐나다 복귀가 결정되면서, 그 과장이 가야할 출장 TO에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의 현대차는 미국 진출 초기라 길에서 보기가 힘들고, 대리점에 가야 볼 수 있었다.

(당시 직찍 사진)

미국의 자동차회사들을 탐방하는 이동과정에서,

길에서 달리는 현대차를 발견하고 이렇게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긴게 남아있는 정도로 현대차는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회사들 탐방은 이슈없이 마무리 되었고, 다음 차례는 모기지 회사들의 탐방 이었다.

넷플릭스에 빅 쇼트라는 영화가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하락에 돈을 걸어서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다.

2006년 봄, 현장탐방 일정으로 미국 LA에 있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회사를 방문했다. (당시 직접 찍은 사진들이다)

한 시간 정도 회사 투어를 같이하며 여성 CEO의 자랑을 들어주자, LA의 산 중턱에 있는 쿠바 레스토랑에 저녁초대를 받았다.

저녁식사 시간까지 두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다.

숙소로 돌아가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회사에서 기다리다 저녁식사 장소로 바로 출발하기로 결정이 났다.

동반자들은 차를 마시며 잡담을 하는등 개인용무를 했고, 나는 허락을 받고 모기지 접수 서류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실제 일하는 사무실에 접수된 대출서류 뭉치들이 쌓여있었고, 나는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당시 직접 찍은 사진들)

서류를 살펴보니, "이런, 개-판이네!" 하는 소리가 나왔다.

직업과 소득증빙도 엉망이었고,

채무자는 금액과 이름 부분에 사인만 하고, 나머지는 브로커가 대필한듯한 서류도 한두개가 아니었다.

두시간쯤 서류를 본 후 저녁식사 장소로 출발했다.

여성 CEO는 작년에는 100억 불대에 그쳤지만, 올해는 200억 불의 모기지를 팔 것이라고 활짝 웃으며 건배 제의를 했다.

CEO와 임원진 모두 자신감에 차 있었고,

"우리는 모기지를 실행하면 장부에 남기지 않고 한 달 만에 다 팔아버린다. 그러면 매달 얼마의 수익이 생기고, 회사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라며, 영업, 마케팅, 수익, 브로커 통제 등등 많은 이야기들을 해줬지만, 위험관리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에게서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다.

회사의 최고 위험관리자인 엄청난 비만체형 CRO(위험관리 최고책임자)는 부스스한 모습에 세상 포기한듯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는 일이 별로 없다. 대출 건들 이 너무 빠른 속도로 나를 지나가서 제대로 볼 시간도 없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중에 인도인 직속 상사가 라이벌로 여기는 옆 부서 임원이 내게 물어봤다

"저 회사 어때?"

나는

5년 안에 망할 거 같은데!”

라고 답했고

네덜란드계 유대인인 그는 "농담도 잘하네" 하는 톤으로 웃었다.

저 회사는 5년이 아닌 2년 만에 망했다.

21. 버크셔 헤더웨이

서브 프라임 모기지의 임원진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서류 뿐만 아니라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Risk를 Hedging하자고 결정했다.

보험사들과 이메일등으로 사전협의를 진행한 후,

팀원 한 명을 데리고 런던의 보험사 한곳과 미국 버크셔 해서웨이를 방문했다.

워렌 버핏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코네티컷주 스탬퍼드에 금융 쪽 인력들이 모여 있었고, 간 곳은 이쪽 이었다.

(버크셔 1층 직찍)

당시 버크셔에서의 회의장면이다.

조건비교 과정을 거쳐서, 까칠한 조건을 제시하는 버크셔 헤더웨이가 아니라, 영국 보험사를 1순위 우선협상대상으로 결정했다.

보험 실무협의를 끝내고, 회사로 돌아와서 썰을 풀기 시작했다.

인도인 직속 상사는 내 제안에 반대를 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보험료가 너무 비싸고, 부동산 가격 하락 가능성이 낮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미국 출장을 같이 갔던 인도인 직속상사의 라이벌 유대인 임원이 내 제안에 찬성하며 임원회의에 안건으로 올리자고 나왔다.

직속 부서장은 반대를 하는데, 그의 라이벌인 타부서 부서장이 찬성을 하는 안을 진행하는 나도 참 특이한 인간이기는 했다.

보험으로 주택가격 하락을 대비하자는 내 제안에 임원진들은 찬반으로 나뉘었고, 가성비가 안나온다는 이유로 반대의견이 우세했다

반대가 우세한 임원회의 분위기 였지만, 오너가 진행을 결정했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아닌, 오너 경영체제의 장점이 발휘된 시간이었다

오너들은 수익 이상으로 손해에 민감한 경우가 많다

내 돈은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문경영인과 이야기할때는 수익을, 오너와 이야기할때는 위험을 강조하는게 타율이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버크셔에 보험을 들었다.

영국 보험사에 보험 가입을 했는데, 영국 보험사가 내부사정으로 사업영역을 변경하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보험을 계속하기 힘들다는 통지가 왔고, 내용을 잘 알던 버크셔가 기존 조건대로 총액 인수하겠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버크셔 제안보다 좋은 조건이었던 영국 보험사 조건을 버크셔가 그대로 수용했고, 버크셔가 보증을 하니 보험사로 신뢰성은 더 높아지는 최선의 결과가 되었다.

매년 100억 원 이상 보험료를 지불했고, 어떤달은 한달에 24억원의 보험료가 나갔다.

보험 가입 후 2년동안은 주택 가격이 내리지않자 헛돈 쓴 게 아니냐는 공격도 많이 받았다.

한동안은 주택가격이 내리기는 커녕 오르기까지 했고, 인도인 상사는 회의 석상에서 그것을 유머 소재로 삼았다

힘든 2년 이었고,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C라는 고과를 받았다

22. 금융위기

2008년,

드디어 금융위기가 왔다.

Loss cap이라는 말이 있다.

보험 용어인데, 보험사의 보상한도를 말한다.

자동차 보험에서 대물 1억이면, 외제차를 박아서 3억짜리 손해가 나도, 보험사는 1억한도로 보상을 해준다는 의미와 비슷하다.

보험사와 마지막까지 협상한 부분은 Loss cap을 어디까지 설정하는지였다.

보험사는 보험료를 깎아준다고 5배짜리를 제시했지만, 나는 10배를 주장했다.

결국 Loss cap 7.5배로 협상이 타결되었다.

납입한 총 보험료의 7.5배까지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금융위기가 지나고 최종 정산을 해보니, 7.4배까지 보험금을 받았다.

워렌 버핏에게는 잔돈이겠지만, 이천억원 좀 넘게 버크셔에 받아낸 것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천억원 좀 넘게 볼뻔한 손해를 보험으로 받아낸 것 보다 더 큰 이익이 있었다.

회사가 수조원의 주택담보대출(모기지)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택가격 하락이 진행되는 금융위기시의 큰 위험요인이다.

신용평가사도 이것을 주목해서, 신용등급을 그대로 놔둘지 만지작거리는 것이다.

그런데, 보험이 있었다.

신용평가사와 보통 이런 문답이 오갔다.

"니들 주택담보대출 자산이 너무 많은 거 아니니?"

"많기는 해. 하지만, 우리는 이미 보험으로 해징을 해놨어"

"보험사가 어디인데?"

"버크셔 헤더웨이!"

"와우~"

회사의 신용등급은 금융위기중에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23. 승진

성과를 인정받아

S고과와 함께 차장에서 부장으로 특진을 하고, 부장1년차에 임원 보직을 받았다.

대리에서 이직한지 3년,

옆부서 임원은 승진을 했고, 인도인 상사는 회사를 나갔다.

인도인 상사가 나간 자리는 내 자리가 되었고, 내 방과 개인비서가 생겼다.

24. 바보가 되자.

승진을 하며 부서원이 백명을 넘어가자 업무스타일을 바꾸기 시작했다.

5명일때의 나는, "나를 따르라" 스타일 이었다.

전체적인 방향과 업무흐름을 세세하게 내가 잡은 다음, 부분 부분 나눠서 팀원들에게 일을 맡기는 방식이었다.

소규모 조직에서는 내 방식이 효율이 높았지만, 조직원이 늘어날수록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바보가 되기로 했다.

너무 많이 알다보니, 너무 디테일한 지적을 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내가 지적을 받는 입장이라면, 일이 너무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들을 통해 업무를 챙기면서 다른 부서 동향과 시장, 세상이 돌아가는데 신경을 쓰기 시작한 때이다.

지금와서 돌아보면, 초창기 5명의 직원중 1명이 임원이 되었다.

홍대 죽순이는 회사를 그만두고 남편따라 미국유학을 갔다가 서울대 교수부인으로 귀국했다.

농땡이는 집이 금수저라 일이 재미없다고 회사를 그만두고 돈쓰는 재미로 살고 있다.

근면성실남이 임원이 된 주인공이다.

한국 사회는 너무 튀는 사람보다, 적당히 똑똑하면서 조직관리도 잘하고 무난한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나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지만 잠재능력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착하고 무난한 사람들을 데리고 일을 하면, 회사생활을 잠깐 편하게 할 수 는 있지만, 성과를 내기 힘들다.

하자가 있지만, 엣지도 있는 사람이 타부서에 저평가로 방치되어 있으면,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하자가 큰 문제가 되지않게 케어하고, 장점만을 발휘하게 업무를 맡기면 보통 성과가 나왔다.

하지만, 하자가 있는 사람과 삐뚤어진 사람은 확실히 구별했다.

회사생활을 하다보면, 매사에 부정적이고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들이 있고, 이들이 능력자로 포장된 경우가 많았다.

삐뚤어진 고평가자와 하자가 있는 저평가자들을 교환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자가 있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케어하는 것 만으로 성과가 올라갔다.

사람은 자기 자리가 있는듯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때다.

한 줄 코멘트. 승부를 걸 때는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상한 상사에게 복수하는 방법에는 버티고 실적을 내서 그 상사를 제끼는 방법도 있다. INTP도 회사생활이 가능하다.

ps)본문에 포함시키지 못한 에피소드 2개

선배의 퇴직을 보면서

https://blog.naver.com/ranto28/223519149539

어울리기 싫어하는 INTP의 회사 생활 이야기

https://blog.naver.com/ranto28/223891147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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